회사를 떠나 집 생활을 하면서 다시금 삶의 방향을 정립하는 중이다. 여유로운 아침과 이부자리를 정돈하는 순간 사이에 숱하게 낯섦을 느끼던 것도 잠시, 일주일도 안되어서 익숙해졌다. 집에서 밥을 먹고, 커피를 내리고, 일을 하고, 빨래를 널고 개고, 설거지를 하며 당연한 진리를 실감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구나-하는. 한편으로 나의 많은 부분이 그간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려는 노력의 산물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장소에 상관없이 어딘가 머리만 대면 잠에 들고, 주기적으로 핸드폰을 확인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피로를 푸는 방식이 주로 유튜브 몰아보기에 가까웠던 나는 이제 없어졌다. 평소 부족함 없이 잠을 잘 자니 밤에 뒤척이는 날이 수두룩하고, 핸드폰보다는 노트북으로 웹서핑을 하는 것이 더 즐겁고, 정신적 피로감이 현저히 줄어드니 영상을 덜 보게 된다. 나의 특징이나 못난 부분이라 여겼던 많은 것들이 어쩌면 규격화된 환경에 최선을 다해 적응하려는 몸과 마음의 보이지 않는 노력이 아니었을까.
당분간 프리랜서로 지내며 재충전의 시간을 갖기로 했지만, 이번에도 첫 회사를 그만뒀을 때처럼 쉬고 싶다는 느낌보다는 어떤 답을 찾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언젠가는 다시 회사로 돌아갈 사람이니 앞으로 이 일을 건강한 방식으로 지속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답을 구해야 하지 않을까. 일을 놓지 않고 계속해나가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 건지 알고 싶다. 돌이켜 보면 줄곧 경험의 가치를 중시하는 내게 밀도 높은 기회를 주고, 무엇보다 다양한 분야의 멋진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업의 매력을 느껴 왔다. 창작자로서 스스로의 향상을 도모하는 방법은 곧 경험의 폭을 넓히는 일이기에 꾸준히 무언가를 많이 만나고, 보고, 들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미술 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자신의 직업에 대해 공개적으로 배움을 이어 나가는 일이라고 설명한 것처럼 평생에 걸쳐 글을 쓰고, 끝내 창작자로 우뚝 서고 싶은 사람에게 경험과 그 끝에 배움을 발견하도록 이끄는 직업은 필수적일 테다.
그간 디자인, 아트, 건축 분야를 글감의 주재료로 다루면서 실제로 경험하지 못한 장소와 사물, 사람에 대해 기사를 쓰는 때가 더 많았다. 그러다 보니 예술 유산이 풍부한 땅을 탐구하고 그곳의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는 열망이 차근히 축적되었다. 내겐 아무래도 스스로 피곤하게 만드는 특기가 있는지, 모처럼 자유가 생긴 김에 지금 떠나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직장인이었을 때는 결코 엄두도 못 낼 석 달의 기간 동안 말이다. 막상 떠나기 직전이 되니 조금만 더 머리를 비우고 아무 생각 없이 쉬다가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앞서는데, 나는 늘 뭐가 그렇게 급한 걸까. 부디 가서 여유롭게 지내는 법도 깨우치고 왔으면 좋겠다. 모쪼록 88일간 디자인, 아트 이벤트가 집약적으로 열리는 이국의 도시를 자유로이 헤맬 예정이다. 일단 시작은 파리. 4월 PAD파리와 밀라노 살로네 델 모빌레, 5월 런던 크래프트 위크와 로테르담 디자인 디스트릭트, 6월 코펜하겐 3DD 그리고 아트 바젤 정도로 굵직하게 정해두긴 했지만 언제라도 바꿀 수 있는 일정으로 다닐 계획이다. 다시 한번 긴 호흡으로 인생에 대한 그림을 그리고, 쓰는 일상을 단련하는 무대가 되기를 바라며. 여정 내내 마음속에 새기고 싶은 문장을 마지막으로 남겨 둔다.
어제와 오늘의 목록이 다르고, 내일은 또 무엇이 꽂혀 있을지 알 수 없는 무질서의 서가 속에서 각자의 질서와 이유를 찾아 나가는 일. 당황하지 않고 자유롭게 헤맬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그 또한 즐거운 과정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고 싶다. - 강민선, <도서관의 말들> (유유, 2019)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