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나 그림도 음식처럼 제철에 만나면 깊게 매료되는 법일까? 봄기운이 움트던 무렵, 한 시인의 에세이를 접하고 든 생각이다. 시인이 머무는 제주의 연둣빛 풍경이 어른거리며, 성큼 다가온 봄에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할지 사유하게 만드는 글이었다. 특히 그가 시구를 해석하는 방식에서 계절의 순환과 봄의 생명력이 느껴졌다.
시편들 가운데 더 많은 시간 동안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체 사롤보잉이 쓴 시구였다. 시 <만남>에서 거듭거듭 등장하는 시구였는데, 그것은 -생의 기운을 돌린/ 태양의 리듬/ 달의 박동이 있는/ 시간의 순환은/ 끝없는 세월의 연속-이라고 진술한 대목이었다. 그런데 시인은 왜 태양으로부터 리듬을 주목했고, 또 달로부터는 박동을 주목했을지 궁금했다.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 보니 낮이라는 시간 동안에 반복되는 노동, 그 생활의 호흡을 태양의 리듬이라고 표현했고, 밤이라는 시간 동안에도 꺼지지 않는 생명의 빛과 그 음성을 박동이라고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생활의 되풀이되는 호흡과 생명의 밝은 빛이 생의 기운이라니. 아무튼 이 시구를 접한 이후로 때때로, 아니 그보다 훨씬 잦게, 마치 화두(話頭)처럼 태양의 리듬과 달의 박동이라는 두 개의 말을 혼자 중얼거렸다. 이 두 개의 말은 그리하여 요즘 내 사유의 첫머리요, 디딤돌이 되었다.
.... (중략)... 그러면서 내가 맞이할 새봄에는 어떤 마음에 근거해 살아가야 할까를 자문하기에 이르렀다. 몽골 시인들이 자연으로부터 얻은 자애롭고 평온하고 순결하고 넓은 마음으로 살아가도 좋을 것이요, 태양의 리듬과 달의 박동이라는 두 개의 말을 내면의 갈피에 넣고 살아도 좋을 테다. - 중앙일보 오피니언 2024.02.21일자, [문태준의 마음 읽기] 중 일부 발췌
새 계절의 길목에서 어느 그림을 마주했을 때도 마음에 미풍이 일렁이듯 달뜬 기분에 사로잡혔다. 지난해 리움미술관 대규모 개인전 버들북 꾀꼬리로 화려하게 복귀한 강서경 작가의 신작이었다. 브론즈를 구부리고 표면을 두드려 제작한 <산 - 아워스>, 꽃잎을 닮은 곡선 고리를 두른 <산-꽃>, 은은한 파스텔색으로 염색된 반투명 비단을 둥근 나무 프레임으로 감싼 형태의 <아워스 - 일> 연작 등 전시장에 봄의 풍경을 한아름 수놓은 듯했다. 국제갤러리 K3에서 4월 28일까지 진행되는 전시로, 제목은 봄의 도래를 힘차게 선언하는 의미에서 마치(March)라 명명했다.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강서경 작가 스스로 리움에서의 전시가 산문 같다면, 국제갤러리에서 선보인 전시는 한 편의 시처럼 여긴다는 말을 했다고 지인에게 전해 들었다.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하고자 부드럽고 투명한 색채로 물든 그림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모양과 방향이 각기 다른 작품 사이를 거닐며 일종의 리듬과 선율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작가가 그려낸 계절의 산수를 제때에 만나 참으로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뜻한 계절감을 선사한 국제갤러리는 사실 내게 때마다 들러야 직성이 풀리는(!) 갤러리 중 하나이다. 웰니스 센터로 리노베이션한 K1과 스펙터클한 건축미를 갖춘 K3, 한옥 공간 등 전시장도 다채롭지만 무엇보다도 작품을 보여주는 방식이 놀랍다. 작가에게 작품 디스플레이의 전권을 일임하는 방식일 수도 있겠으나, 만일 그렇다 하더라도 그러한 사실 자체로 멋지지 않은가. 현재 함께 열린 1세대 조각가 김윤신의 전시에서는 공간을 보다 입체적으로 느껴지게 만드는 배치법이 돋보였다. 구순을 앞둔 그녀가 치열하게 쌓아 올린 삶의 흔적이 유려하게 도열한 원목 나무 조각에 담겨 어떤 숭고미를 낳는듯했다.
이곳에 관한 또 다른 좋은 기억을 꺼내보자면, 작년 봄 열린 홍승혜의 개인전을 특별 운영시간에 보러 갔던 경험이다. 거의 모든 갤러리는 오후 6시면 문을 닫지만 당시 국제갤러리는 작품의 특성을 살리기 위해 저녁 8시까지 연장 운영을 한 바 있다. K1, K2 전시장에서 네모의 그리드에서 탈피해 다채로운 도형으로 조각, 가구 등을 선보인 것도 인상적이었지만, 그중에서도 암전된 K3 전시장에서 사운드와 조명을 결합한 작품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전시장으로 향하는 길과 내부에서 목도한 풍경이 시퀀스로 연결되며 임팩트를 남겼다.
국제갤러리 주변에 함께 들르기 좋은 장소도 계속해서 늘고 있다. 갤러리현대, 학고재, 현대화랑, PKM 갤러리, 바라캇 컨템퍼러리, MMCA, 테라로사, 논픽션 삼청, 월하보이, 이라선, 카페 시노라 등. 삼청동으로 향할 때면 언제나 최상의 컨디션이기를 바라는 이유다. 안팎으로 계절감을 느낄 수 있는 예술 공간을 찾는다면 이곳으로.
장소
서울 종로구 삼청로 54
시간
월-토 10:00-18:00
일 10:00-17:00
인스타그램
@kukjegalle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