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과 나날> 뉴스레터 2022-2023




발견의 기쁨, 유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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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생활과 나날>의 발행인 길보경입니다.


어제 작성한 글이 모두 날아가는 바람에 오늘에서야 편지를 전합니다. 같은 내용을 두 번 쓸 만큼 글의 내용이 좋지도, 제 머리가 그만큼 좋지도 않기에 다시 새롭게 글을 지어 봅니다. 갓 지은 밥이 맛있듯 금방 완성한 글을 여러분께 내어 드릴게요.


세렌디피티(Serendipity)라는 단어, 한 번쯤 들어 보셨죠? 정확한 뜻을 알고 계신 분들도 많을 텐데요. 우연한 발견, 뜻밖의 행운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2001년에 개봉한 존 쿠삭, 케이트 베킨세일 주연의 영화 제목으로 대중에게 알려지기도 했죠.


저는 지난 주말에 다녀온 일본 여행에서 하나의 단어만 길어 올린다면 바로 세렌디피티를 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여행이 주는 즐거움 중 하나가 바로 발견일 텐데요. 저는 유후인이라는 온천 마을에서 세렌디피티를 경험했습니다. 스치듯 지나갔을 수도 있는 한 건축물을 마주하게 되었고, 잠시 안에 머물렀어요. 한국에 돌아와서도 뇌리에서 떠나지 않을 정도로 그 건축물에 크게 감응했죠.


뚜렷한 계획 없이 깊이 알아보지 않고 떠났던 여행인지라 과연 어떤 풍경과 사람과 사물을 운명처럼 만나게 될지 전혀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사실 특별히 기대하는 무언가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요.


그런데 저는 이곳에서 평생 탐구하고 싶은 어떤 건축가와 그가 설계한 건축물을 만나게 되었어요. 건축가의 다른 프로젝트를 보기 위해 다시 여행을 떠날 수 있을 만큼, 하나의 목표가 될 만큼 제게는 유의미한 존재로 남았습니다.


오늘은 유후인의 이모저모를 소개하고, 다음에는 후쿠오카에서 느꼈던 여러 단상을 그러모아 전할게요.


그럼 유후인에서의 하루, 우연한 발견의 기쁨을 함께해 보아요.


오이타 유후시에 위치한 유후인은 후쿠오카 공항에서 두시간 반 남짓 이동하면 닿을 수 있는 작은 산촌 마을입니다. 가는 길 내내 삼나무와 대나무가 빽빽이 도열한 산의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요. 유후인역에 내리자마자 위용을 자랑하는 명산과 얼굴을 맞댄 기분이 들었습니다. 유후다케 산이 마치 마을을 감싸안은듯 어느 각도에서든 웅장하고 수려한 산봉우리가 고개를 내밀고 있더군요.


자전거를 타고 긴린 호수로 향했습니다.(사실 자전거 라이딩보다는 짐을 맡기기 위한 목적이 더 컸어요. 어느 나라든 대부분의 자전거 대여소는 여행자의 짐을 너그럽게 받아주는 것 같습니다.) 날이 온화해서 호숫가 주변에서 잠시 산책하거나 커피를 마시면 딱일듯 싶었거든요. 가을의 정취가 짙게 물든 풍경을 감상하며 10여분을 달리니 금방 도착했어요. 근처에 자전거를 세우고 누가 훔쳐가지 않기를 마음 속으로 기도한 후에 호숫가를 거닐었습니다. 커다란 잉어떼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더군요. 긴린 호수의 바닥에서는 차가운 지하수와 뜨거운 온천수가 동시에 샘솟는다고 해요. 제게는 한없이 평온하고 고요한 모습만을 보여준 호수였습니다. 


호숫가와 바로 맞닿은 카페인 Cafe la Ruche를 보자마자 바로 시선을 빼앗겼습니다.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테라스, 편안해 보이는 나무 의자, 작고 아름다운 유리 조명을 보니 없던 여유도 생길 것 같더군요. 이 분위기에서 와인을 빼놓을 수 없죠. 커피에서 바로 노선을 틀었습니다. 동네 마트에서도 몇 번 사 먹어 보아서 익숙한 La Vieille Ferme Blanc을 하프 바틀로 팔더라고요. 부드럽고 산뜻한 맛의 무난한 화이트 와인이라 낮에 마시기 좋았어요.

  

역에서 꽤 거리가 있는 숙소를 호기롭게 걸어 가기로 했어요. 지도를 보면서 잘 따라가고 있었는데, 데이터가 터지는 핸드폰이 수명을 다하는 바람에 기억력에 의존해서 찾아 가다가 결국 길을 잘못 들었습니다.


인적이 드문 시골길을 누가 봐도 외지인 같은 두 명이 헤메고 있으니 때마침 집밖을 나선 일본인 아주머니께서 말을 거시더군요. 물론 일본어로요. 저희가 못 알아 듣는데도 끝까지 아주 우렁차고 또박하게 일본어를 하시면서 손짓으로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저희도 대충 끄덕끄덕 하면서 자신 없는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를 외치며 고개를 넘기 시작했습니다.


몸이 방전되어 가는 와중에도 눈앞의 호젓한 시골 풍경을 보며 지금 이 상황도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저의 캐리어까지 끌어 주며 듬직하게 앞장 서는 Y군이 있어서 그랬는지도.. 

    

일본의 전통 숙소인 료칸을 경험할 시간. 야외 노천탕에서 지친 몸을 녹이는 시간이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었어요. 유후인 료안 와잔호(Yufuin Ryoan Wazanhou)에서는 마사지룸과 무제한 라무네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온천 후 사이다 한병 들이키고 마사지 기계에 눕는 그 자리가 바로 천국이네요.  


이렇게 예쁜 밥상 보신 적 있나요. 물론 제가 먹은 흔적은 아닙니다만, 이 식당 때문에라도 유후인에 재방문하면 와잔호에서 또 머물 것 같아요.  


후쿠오카로 이동하기 위해 기차역으로 갔어요. 동화속에서 나올법한 샛노랑의 기차를 보며 우리의 기차는 무슨 색일까 기대하게 되었죠. 출발 시간까지 여유가 있어서 카페를 들르려던 찰나, 왼쪽에 심상치 않은 파사드의 건물이 있는 것을 보았어요. 


2층 규모의 건물 구조가 매우 독특하면서도 강렬한 아우라를 지니고 있었는데요. 안에 작은 도서관처럼 라운지 공간이 있어서 잠시 책을 볼겸 그곳으로 향했습니다. 


내부의 천정와 기둥을 이루는 나무 벽체가 참 아름답고 따스한 공간감을 자아내더군요. 동양의 담백하면서도 우아한 멋을 품은듯, 물결 모양으로 교차하는 구조와 동그랗게 창을 낸 모습이 가히 예술적이었습니다. 이곳은 일본의 건축가 반 시게루가 리노베이션을 맡아 2019년에 개관한 유후인 인포메이션 센터입니다.


안도 다다오나 이타미 준처럼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이기에 이름은 들어본 적 있지만 그의 대표작이나 뚜렷한 스타일이 연상되지는 않았어요. 알고보니 반 시게루는 종이를 재료로 한 인간적이고 자연친화적인 건축 스타일을 고수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소수나 약자의 주택 문제에 관심이 많아 재난 피해 지역이나 분쟁 지역을 찾아다니며 종이와 대나무, 천, 플라스틱 등의 단순한 자재로 난민 보호소를 지어 고통 받는 이들을 위로해 오고 있기도 합니다.


그는 건축가로서 사회에 어떤 이로운 역할을 할 것인가라는 의문을 품고 종이 건축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하네요. 괜히 그의 건축물에서 따스한 온기가 느껴진 게 아닌 것 같아요. 2014년에 반 시게루는 인류에 대한 공헌을 온몸으로 실천한 건축가라는 평가와 함께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바 있습니다. 


이 귀엽고 혁신적인 디자인의 의자는 재생지를 활용한 종이 튜브로 만든 의자인데요. 반 시게루가 건축물, 가구에 사용하는 종이 튜브는 파라핀 물을 활용한 방수 가공 처리를 통해 가벼우면서도 견고하게 만든 것이라고 해요. 구조적으로 튼튼하고 내구성을 갖추기 위해 굵은 기둥을 줄기둥 모양으로 사용하면서도, 종이 건축만의 독자적인 형상을 탄생시킨 것이죠.


기본적인 재료로 환경과 사람에게 덜 해로운 건축을 구현해내다니! 정말로 감동적이지 않나요. 반 시게루의 종이 건축은 이세이 미야케의 패션쇼장이나 파리 퐁피두 센터 별관처럼 화려하게 꽃을 피우기도 하지만, 난민을 위한 임시 거처 같은 도움의 손길이 절실한 곳에 닿고 있습니다. 최근 우크라이나 난민을 위해 하루만에 320개의 방을 보유한 임시 거처도 만들었다고 해요. 행동하는 건축가, 반 시게루. 앞으로 제게 유후인은 반 시게루로 기억되지 않을까 합니다.


이번에도 긴 글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내일 출근도 화이팅입니다. 


있는 자리에서 이 계절의 정취를 담뿍 누리시길 바라며,

하루의 가뿐한 시작을 기원할게요. 

2022.10.25

길보경 드림   



새해를 맞이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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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길보경입니다.

오랜만에 편지를 올립니다. 그간 어찌 지내셨는지요?


묵직한 슬픔이 우리의 일상을 압도하다가도 스포츠라는 장르가 주는 쾌감에 뜻밖의 감정을 느끼고 위안을 얻은 요즘입니다.


이렇게 행과 불행, 기쁨과 슬픔, 생기와 허무 사이를 오가는 하루가 곧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삶의 단면을 볼 수만 있다면 정말 무지개떡 같은 모습이지 않을까 싶네요. 


예측하기 어려운 매일은 불안을 주지만, 그런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안아줄 때 또 다른 단단함이 생기는 것 같고요. 올해만 해도 제 안팎의 연약함을 여러 번 마주하고, 인정하며, 어떻게 극복할지 고민하며 보낸 시간의 연속이었는데요. 제 마음에 작은 빛이 되어준 존재를 여러분과 천천히, 부지런하게 나누고 싶어요. 


이제 2022년도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네요. 연말이라는 시기는 계절적으로는 몹시 추울지라도 어쩐지 마음에는 가장 온기가 감도는 때인 것 같아요. 한동안 못 보던 좋아하는 사람들과 연락을 주고받기도 하고, 밖을 나설 때면 크리스마스 특유의 분위기가 가득해서일까요?


지금도 저는 반짝이는 트리를 보며 글을 적고 있어요. 따듯한 얼그레이 차도 홀짝이며, 카페에 흘러나오는 재즈를 듣는데 포근하고도 평화롭네요. 이 시점에 여러분께 다시 편지를 보내게 된 기념으로 새해를 맞이하는 저만의 의식을 소개할까 합니다. 


저는 연말연초에 꼭 새해 버킷리스트 빙고와 올해의 어워드를 적어보곤 합니다. 먼저 새해 버킷리스트 빙고는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 새해에 이루고 싶은 소망을 빙고처럼 적어보는 겁니다.


2x2, 3x3, 4x4 등 적당한 크기를 선택하고, 목표를 이루어 칸을 하나씩 지워 나갈 때마다 보상책도 함께 마련하는 것인데요. 1개 달성시, 1줄 달성시, 3줄 달성시 등 각각 어떤 상을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식으로 말 그대로 빙고 게임을 즐기는 방법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적는 것만으로도 다가오는 새해에 대한 기대감이 생겨 좋더라고요.


저의 2022 버킷리스트 빙고에 있던 목록을 다시금 들춰 보니 


일기 꾸준히 쓰기, 러닝 10km 달성하기, 한 달에 한번 문화생활하기, 커피와 와인 공부하기, 비건 경험 늘리기, 요가 배우기, 제주도& 해외로 여행 가기, 홈페이지 리뉴얼 작업하기 등이 있었네요.


여기서 제가 몇 가지를 이루었는지는 비밀입니다. 궁금하시면 메일 답장으로 혹은 나중에 저랑 만났을 때 당신의 2023년 버킷리스트 목록을 공유해 주세요. 그때 말씀드릴게요 :)


두 번째 올해의 어워드는 한 해를 돌아보고, 그 해의 특별함을 기억하기 위해 만들어 본 것인데요. 예를 들어, 올해의 인물(내게 큰 영향을 준) - 최고의 책/영화 - 기억에 남는 멋진 공간 - 경험한 최고의 순간 등 올해의 00를 꼽아 보는 겁니다.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새까맣게 잊고 있었던 사람, 사건, 장소 등이 떠오르기도 하더라고요. 지난날의 추억을 톺아보며 2022년이 내게 어떤 한해였는지 재발견해보는 것 어떠세요? 


앞서 소개드린 두 가지 방법은 혼자서 차분히 적어 보아도 물론 좋지만, 연말 모임에서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재미로 해보기를 권합니다. 여럿이 모이면 더 다양하고도 재밌는 이야기가 오갈 테니까요.


저는 1월 초에 새로운 소식과 함께 다시 찾아뵐게요. 현재 웹사이트 리뉴얼 중인데, 내년 초에 작업을 완료하면 좀 더 보기 좋고 유용한 콘텐츠를 선보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럼 모두들 안온한 연말연초 보내시고, 새해에 만나요!


2022.12.04 

사랑을 담아

길보경 드림   


잘자는 밤, 새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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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생활과 나날>의 발행인 길보경입니다.


1월에 찾아오겠다는 약속을 지키고자 설날 밤에 노트북을 열고,

여러분께 편지를 올립니다. 


올해 어떤 새 결심을 하셨나요? 저는 그 어느 목표보다도 잠을 잘 자는 한 해를 소망합니다. 요즘 어떻게 해야 양질의 수면을 누릴 수 있는지 고민하며 주변인들과 대화를 나눠 보니 확실히 저마다 적정한 수면 시간이 있는 것 같아요. 각자 신체의 에너지가 활성화되는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그에 맞게 잠을 조절할 필요가 있겠더라고요. 


저는 평소 불면증이 있거나 수면 부족을 겪는 편은 아닙니다. 되려 마감 기간을 제외하고는 충분히 잘 자고, 머리 댈 곳만 있다면 고고르르하고 곯아떨어지곤 해요. 그런데 하루만 취침 시간이 부족해도 며칠간 생활에 지장을 크게 받습니다. 요 근래 도통 컨디션이 좋지 못해 왜 그럴까 생각해 보니 이번달 마감 이후로 잠을 푹 못 잤더라고요.


저의 오랜 친구가 얼마 전 술자리에서 한 말이 떠올랐습니다. 너는 에너지가 넘치다가도 꼭 밤이 늦으면 일순간 스위치를 끈 로봇처럼 변한다는 말이요. 생각해 보면 저는 정말로 졸음에 취약한 편이라, 평소 수면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만 하는 사람입니다. 아마 시대와 운명을 잘못 타고나서 잠을 안 재우는 고문이라도 당했다면 가장 먼저 죽었을 게 분명해요(..) 사실 잠이란 게 누구에게나 너무나 중요한 문제죠. 그런데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잠을 줄여서 생산성을 높이는 환경에서 학습을 당하다 보니, 어른이 되어서도 때로는 그 중요성을 잊고사는 것 같아요. 잠을 잘 자야 모든 게 바로 선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잠 자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아침이 오기 때문이기도 한데요. 새 날이 밝아서 다시 시작되는 하루가 몹시 반갑고, 또 다행스러워요. 어제의 나를 짓누르던 대소사가 언제 그랬냐는 듯 침대 위에 녹아내리고, 몸과 마음이 가뿐해지는 느낌이 기적처럼 오니까요. 여러분도 경험해 보셨을 테 죠. 저는 늘 도망치고 싶은 문제나 미래가 있을 때면 오히려 여느 때보다 잠을 일찍 청합니다. 아침이 되면 어디선가 용기가 샘솟아 나요. 자고 나면 뭔가 해결될 거라는 기적을 믿고 잠을 청한다기보다는, 그저 조금이라도 더 나은 에너지와 정신을 갖추기 위함이지요. 


잠의 거룩함, 그리고 아침의 선물을 잘 묘사한 책이 있습니다. 정희재 작가의 <아무튼, 잠>인데요. 작가는 잠에 관해 아래와 같이 묘사합니다.


"잠을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 정직해서다. 잠처럼 투자한 만큼 따박따박 대가를 돌려주는 체계도 드물다. (중략) 잠은 투자한 시간만큼 심장 건강과 체력, 그리고 집중력을 돌려준다. 모질고 거친 세상에서 쪼그라들었던 마음도 복원된다. 

 잔다는 건 결핍과 욕망의 스위치를 잠깐 끄고 생명력을 충전하는 것. 잡념을 지우고 새로운 저장 장치를 장착하는 것. 쓰라린 일을 겪고 진창에 빠져 비틀거려도 아주 망해버리지 않은 건 잘 수 있어서다. 잠이 고통을 흡수해 준 덕분에 아침이면 사는 게 별 건가 하면서 그 위험하다는 이불 밖으로 나올 용기가 솟았다."


여러분도 잘 자고, 가뿐한 아침을 자주 만나시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우리 올해 더욱 잘 자도록 해요. 사는 게 별건가. 그쵸?


이제는 꿈결처럼 아스라한 부산 여행기를 짧게나마 공유하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혹시 부산에 갈 일이 있으시거든 가볍게 참고해 주세요. 



한해의 끝자락에 만난 숙소 플라쥬(https://www.stayfolio.com/findstay/plage)는 재즈의 포근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집입니다. 문을 열었을 때부터 재즈의 선율이 감미롭게 흘러나오고 있었는데요. 실로 이곳엔 재즈와 관련된 음악과 책이 가득했습니다.


크리스마스 시즌과 꼭 어울리는 Vince Guaraldi Trio의 <A Charlie Brown Christmas>나 개인적으로 매우 애정하는 곡인 <The Girl from Ipanema>가 담긴 Getz/Gilberto의 앨범, Nina Simone의 오리지널 앨범 시리즈 등이 있었어요. 이뿐만 아니라 책장에는 그림책과 예술, 인문 분야의 서적으로 빼곡했습니다. 소설책도 상당해 폭신한 소파에 누워 재즈를 감상하며 독서의 시간을 갖기에 제격입니다.


집 같은 일상적 면모에 스며들기도 잠시, 플라쥬의 중정을 보는 순간 어느 휴양지에 놀러온 듯합니다. 햇볕이 깊게 드리우는 중정과 왼편에는 그 중정을 바라보면서 즐길 수 있는 1.5평에 달하는 실내 욕조가 있습니다. 욕조가 포함된 욕실과 화장실, 세면대가 별도로 나뉘어 있어 쾌적한 환경을 누릴 수 있었죠.

 


플라쥬는 요리를 즐기기에 최적화된 레이아웃의 주방을 갖췄습니다. 넉넉한 수납공간과 조리 공간을 갖춘 데다 다이닝 테이블과 바로 맞닿은 아일랜드 덕분에 음식을 만들고 식탁으로 옮기기가 편리했죠. 또한 상부장과 하부장에는 조리 기구와 식기가 종류별로 가득했어요. 화이트 컬러와 우드 소재가 자아내는 모던하면서도 깔끔한 분위기는 주방에 머무는 시간을 더욱 즐겁게 만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아침 식사 때 곁들이기 좋은 시리얼과 디카페인 커피, 홈 파티를 위한 용품 등은 호스트의 사려 깊은 마음을 느낄 수 있었어요. 아래 간단한 정보를 덧붙입니다.


주소: 부산 해운대구 송정중앙로 9번 길 24-9 (송정동) 2층

기준 인원: 3인(최대 3인)

구성: 거실, 주방, 침실, 루프탑, 욕실(실내 욕조), 화장실

주변 추천 spot:

송정해수욕장/ 해운대블루라인파크 송정정거장/ 부산시립미술관/ 뱅오제니스 송정(와인숍)/ 원조할매국밥(돼지국밥)/ 올드머그(카페)/ 해운마루(회)/ 디아트커피(카페)/ 어가(회-전포)


부산에서 갔던 카페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은 단연 뉴포트(@newport_busan)입니다. 조용한 언덕길 위에 자리한 이곳은 부산 전포동의 포스터 숍이자 일러스트를 기반으로 다양한 아트워크를 선보이는 디자인 스튜디오, 카멜앤오아시스가 전개하는 카페 겸 쇼룸입니다. 좋은 음악과 커피를 즐기면서도 때마다 진행되는 전시를 관람할 수 있어요. 디자인과 재즈, 커뮤니티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공간입니다. 높은 층고와 밝은 햇살, 아르텍 가구의 따스함이 어우러져 완벽한 하모니를 뽐내는 곳이죠. 광안리 해변 근처이니 꼭! 들러 보시길 바랍니다. 


끝으로, 저의 홈페이지(www.seoulsoul.kr) 리뉴얼은 아직 진행 중입니다. 아마 2월에는 이전의 글과 더불어 새 글을 올릴 수 있겠죠? 그럼 다음 편지에서도 새 이야기와 여행으로 찾아 올게요.


새해 복 듬뿍 받으세요, 여러분 :)


2023.01.22 

사랑을 담아

길보경 드림



 여름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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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생활의 나날>의 발행인 길보경입니다. 

사그라지지 않는 무더위를 어떻게 나고 계시는지요? 바깥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흉흉한 소식도 끊임없이 들려와 하루에 몇 번씩 머리가 핑 도는 느낌이 듭니다. 부디 모두 무탈하고 가뿐한 여름 보내시길 바라요.

 

여러분께 예고 없이 편지를 쓰게 된 이유는 좋은 시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저는 요즘 복잡한 일이 한바탕 끝나고 마음의 여유가 조금 생겼지만 희한하게 무력감에 빠져 있었어요. 날씨와 생활이 뒤엉켜 미궁 속으로 빠지는 것만 같았죠. 즐거울 수밖에 없는 일을 앞두고도 감정의 파동이 일지 않아 스스로 의아했습니다. (텐션의 기본값이 높은 인간이라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요일인 오늘, 전날 과음을 했는데도 생각보다 머리가 맑아 침실에 놓아둔 책을 집어 들었습니다. 이번 주에 친구(Thanks to @page__708!)에게 선물 받은 안희연 시인의 시집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이었습니다. 친구는 늘 저와 자신을 여름 인간이라고 규정하며, 이번에도 시집을 통해 우리가 사계절 중 가장 활기차고 호기롭게 살아가는 시기가 당도했다고 일러주었죠.

 

여름의 한가운데에 이 시집을 마주한 것이 한몫한 걸까요. 시인이 바라본 여름의 모습이 제 마음에 구멍을 숭숭 내주었어요. 막혀 있는 공간에서 탁 트인 그늘로 나아가는 기분이였습니다. 매번 텍스트(대체로 문학)로 삶의 불가해를 조금이나마 풀어보고자 하는 제게 딱 맞는 처방이었죠.


살며시 포근하게 위로가 된 시 두 편을 공유합니다.

 

1

열과 _ 안희연

 

이제는 여름에 대해 말할 수 있다

흘러간 것과 보낸 것은 다르지만

 

지킬 것이 많은 자만이 문지기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지기는 잘 잃어버릴 줄 아는 사람이다

 

그래, 다 훔쳐가도 좋아

문을 조금 열여두고 살피는 습관

왜 어떤 시간은 돌이 되어 가라앉고 어떤 시간은

폭풍우가 되어 휘몰아치는지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솔직해져야 했다

한쪽 주머니엔 작열하는 태양을, 한쪽 주머니엔 장마를 담고 걸었다

 

뜨거워서 머뭇거리는 걸음과

차가워서 멈춰 서는 걸음을 구분하는 일

 

자고 일어나면 어김없이

열매들은 터지고 갈라져 있다

여름이 내 머리 위에 깨뜨린 계란 같았다

 

더럽혀진 바닥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여름은 다시 쓰일 수 있다

그래, 더 망가져도 좋다고

 

나의 과수원

슬픔을 세는 단위를 그루라 부르기로 한다

눈앞에 너무 많은 나무가 있으니 영원에 가까운 헤아림이

가능하겠다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134-135P, 창비

 

2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_ 안희연


(중략)


나는 언덕의 기분을 살폈다

이렇게 많은 물웅덩이를 거느린 삶이라니

발이 푹푹 빠지는 여름이라니

무엇이 너를 이렇게 만든 거니

 

언덕은 울상을 하고서

얼마 전부터 흰토끼 한마리가 보이질 않는다 했다

 

그뒤론 계속 내리막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밤이 왔다

언덕은 자신에게

아직 토끼가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지만

 

고요 다음은 반드시 폭풍우라는 사실

여름은 모든 것을 불태우기 위해 존재하는 계절이라는 사실도

모르지 않았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토끼일까

쫓기듯 쫓으며

 

나는 무수한 언덕 가운데

왜 하필 이곳이어야 헸는지를 생각했다

 

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떤 시간은 반으로 접힌다

펼쳐보면 다른 풍경이 되어 있다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45-47P, 창비

 

시를 읽으면서 무슨 생각이 스쳤나요? 저는 출근길마다 놀라곤 했던 아침의 풍경이 떠올랐어요. 이른 시간인데도 여름이 활짝 피었다는 생각이 들 만큼 햇살과 풀, 벌레의 맹렬한 몸짓이 인상적이었거든요. 무르고 터지며 팽창하는 시절에 마냥 쫓기는 듯하지만 끝을 걱정하기보다는 다음으로 계속 가보자고, 등을 떠밀어 주는 힘이 느껴지기도 했어요. 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면서 말이죠. 망가진 시간에 주저앉지않고 그 더럽혀진 모습을 껴안아 다시 시작하는 마음에 관해 상상해 보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양경언 문학평론가가 해설한 문단의 일부를 남겨 둘게요. 기운 차리기 쉽지 않은 시절이지만 삶과의 불화를 어떤 방식으로든 이겨내 보아요.

 

시인이 말과 관계 맺는 방식을 떠올리면서 다시 여름에 대한 기록을 읽어볼까. 시인에게 여름은 이런저런 사연들로 인해 우리 몸 저변에 우리 자신도 모르게 스며든 적의 싸우는 시간이다. 또한 우리의 시야를 한정하고 생각의 방식을 조율하려 드는 우리 마음속 알 수 없는 것이 고개를 들 때마다 그것의 정체를 내내 살피기 위해 열렬한 탐험을 감행하는 계절이기도. 작정하고, 고요하게 맹렬할 수 있는 날들이다. 여름이라고 적어두었으나 이 말엔 시인이 통과 중인 어떤 감정의 과정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갈지 알 수 없으나, 그 미지를 조건 삼아 계속해서 흐르고 있을 마음의 무늬가. (후략)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139P, 창비

 

 

*공지

제가 어떤 주제의 글을 다루면 흥미로울 것 같나요? 기존에 해왔던 것과 더불어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어 묻습니다. 큐레이션 형태의 글, 에세이, 소설, 인터뷰 등 형식과 주제 면에서 자유롭게 의견 전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답변을 보내주신 세분을 랜덤으로 선정해 올해 출간된 문보영 시인의 시집, 강화길 소설가의 단편집, 공간력을 주제로한 인문학 서적 중 한 부씩 보내 드릴게요. 8월 15일에 개별적으로 연락 드리겠습니다. :)

 

2023.08.06 

사랑을 담아

길보경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