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과 나날> 뉴스레터 2022-2023




시작하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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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생활과 나날>의 발행인 길보경입니다. 2022년 여름호의 구독자 님들께 인사드립니다. 8월 21일 일요일 밤부터 매주 한 편씩 글을 보내드릴 예정입니다. 앞으로 제 글을 읽어주실 독자님들께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첫 연재를 앞두고 저에게도, 여러분에게도 의미 있는 이야기를 들려 드리고 싶은 욕심에 며칠간 고민이 많았습니다. 저는 어김없이 비가 오는(이번 여름은 비로 기억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토요일의 아침, 가장 좋아하는 동네 카페의 구석 자리에 앉아 이 글을 적고 있는데요. 오른편에는 강아지와 함께 브런치를 즐기는 중인 여성 분과 왼편에는 다정한 말투와 행동으로 아이를 놀아 주고 있는 부모님이 계시네요. 다정하고 따듯한 분위기에 힘입어 좋은 문장이 술술 써지길 희망해 봅니다.


이번 주는 제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에 대한 설명으로 포문을 열고자 합니다. 여행을 주제로 잡은 이유는 저의 생각의 뿌리가 언제나 여행과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여행하는 듯 살아가고 싶기에 생활 속에서 여행을 떠올리곤 합니다. 사실 제가 글을 쓰게 된 이유도, 평생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겠다고 다짐한 계기도 모두 여행에서 비롯되었습니다.


20대 초반에 단짝 친구들과 몽골 여행을 떠났는데 당시 마주했던 환상적인 풍경, 좋은 사람들 그리고 비현실적인 사건을 어떻게든 남겨야 할 것 같았어요. 핸드폰이 먹통인 채로 보냈던 10일의 시간 동안 나를 둘러싼 세상과 제대로 대면하며 새로운 층위의 충격을 맛보았다고 할까요. 물론 좋은 쪽으로요. 브런치에 여행기를 연재하기 시작하며 앞으로도 경험을 글로 적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기록하는 일이 즐거웠어요.


이후 서울로 돌아와서 세계를 떠돈 모험가의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는데요. 지구의 수많은 아름다운 풍광을 찾아 나서는 사람들을 보며 여행을 지속할 이유를 공고히 했죠. 세상에 갈 곳이 너무나도 많다, 이런 아름다움을 자주 목격하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야겠다, 라는 생각을 하면서요. 하지만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다 보니 언제나 여행자로 살아갈 순 없더군요. 채워야 할 학점이 있었고, 또 취업이라는 관문이.. 이제는 전지구적인 재난도 염두하며 노심초사 살고 있죠.


그럼에도 한 가지 다행스러운 사실은 일상도 여행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분명 있다는 겁니다. 저는 여행이란 많이 걷고, 많이 보고, 새로이 시도하며 낯선 세계와 교감하는 일이라고 보는데요. 지난한 일과 속에서도 때로 낯선 감정이 들 때가 있더라고요. 이를테면 처음 가보는 골목길을 걷다가 우연히 근사한 공간을 만났을 때,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다 속 깊은 감정을 공유했을 때, 좋은 예술을 경험했을 때 등 일상과 비일상을 모호하게 만드는 순간이 예기치 않게 찾아오곤 해요. 


요즘 제가 느꼈던 바로 그때는 바로 백색의 공간에 자리한 어느 화가의 작품을 마주한 순간입니다. 어느 도시에 가든 반드시 그곳의 미술관이나 갤러리를 꼭 들러 보는데요, 언제 어디서든 예술 공간이 주는 고아한 정취와 여백이 잠시 저를 향해 있던 생각을 바깥으로 향하게 만들어 주더라고요. 매일같이 마주하는 나를 잠시 잊고, 세상을 만나게 해주는 그 순간이 제겐 참 귀한 경험이면서 여행입니다. 


 다음 주 일요일부터 시작될 첫 글의 주제는 예술이 깃든 서울 산책이 될거예요. 9월 프리즈(FRIEZE) 서울과 키아프(KIAF) 페어를 앞두고 서울 곳곳에서 미술 축제가 벌어질 거라 예상해요. 저는 아트벨트처럼 좋은 갤러리와 미술관이 모여 있는 서울의 동네를 소개하면서, 놓치지 말았으면 하는 전시도 몇 가지 제안할 계획입니다. 


그럼, 시작하는 글을 즐겁게 읽어주셨길 바라며 다음 주에 정식으로 찾아뵐게요. 

혹시 궁금한 점이 있다면 rlfqhrud1995@naver.com 으로 문의 주세요. 

고맙습니다!   

  



2022.08.14 

애정을 담아

길보경 드림   



어느 날의 예술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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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길보경입니다.

 

24절기는 과학이라더니 처서(處暑)가 지나자마자 제법 선선해졌어요. 불쑥 찾아온 가을이 반갑기도 하면서, 이제는 여름이라는 단어를 잠시 접어둘 때가 된 것 같아 조금은 섭섭한 마음입니다.

 

첫 번째 글을 보내고 나서 몇몇 구독자 분들이 가까운 사람에게 편지를 받는 것 같다거나 라디오를 듣는 것 같아서 좋다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사실은 이렇게 편지글 형태로 보낼 생각이 아니었는데 보다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 될 수도 있겠다 싶어서 당분간은 이 방식을 유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또 한 가지, 아무 안내도 없이 지난주에 글을 보내지 못했어요. 냉방병에 걸려 며칠 끙끙 앓느라 정신없이 한 주가 흘러갔습니다. 갑작스러운 인재지변(?)을 겪는 바람에 평일에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일요일까지 왔네요. 이렇게 변명만 늘어놓아 정말로 죄송스러운 마음입니다. 열의만 앞서서 비상 상황에 대한 대비도 마련하지 않은 채 이렇게 오늘자 원고를 적고 있는 지금입니다.

 

이럴 때마다 왜 꾸준함이 곧 재능이라는 말이 나오는지 절감합니다. 평소에 틈틈이 대비책을 마련해두고 때마다 보낼 수 있도록 해야겠어요. 좀 더 건강하고 신실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며, 이번 주에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시작할게요.

 

서울에서 예술을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동네는 삼청동과 한남동이 아닐까 합니다. 경복궁 주변에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해 국제갤러리, 페로탕, PKM갤러리 등이 모여 있어 도보로 한 바퀴 돌기 매우 편하죠.

 

한남동 일대 역시 페이스갤러리와 리만머핀, 알부스 갤러리, 가나아트 보광 등 폭넓은 장르의 예술을 경험할 수 있는데요. 해외에서 시작한 갤러리들이 속속들이 서울에 분점을 내는 것을 보니, 아시아의 아트 허브는 정말 서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추천하고 싶은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진행 중인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이중섭>과 알부스 갤러리의 <르 자르뎅 판톰: 꿈의 화원(티보 에렘)>, 곧 열릴 국제갤러리 <Lee Seung Jio(이승조)> 입니다. 작가의 작품도 훌륭하지만 전시 공간 자체가 예술처럼 다가올 만큼 근사한 곳들이기에 방문을 권합니다.

 

저마다 휴식을 취하는 방법이 다를 텐데, 저의 경우는 그림을 볼 때 진정한 쉼을 누리는 것 같아요. 왜 이런 감정이 들까 스스로 생각해 보았는데, 예술이 주는 어떤 힘이 저에게 생명력을 발휘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빈 공간에 턱 하니 놓인 그림을 보고 있으면 마치 다른 세상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아요. 취재차 방문한 국립현대미술관 이중섭 특별전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는데요.

 

<춤추는 가족>이라는 제목의 작품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어요. 표정이 명확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모두들 웃고 있는 것 같았어요. 매우 화목해 보이는 가족의 모습을 보면서 이중섭의 삶이 궁금해졌는데요. 이 사람은 도대체 어떤 일생을 보냈길래 이렇게 아이들을 소재로 수많은 그림과 편지를 남겼을까 싶었죠. 연대기로 구성한 전시라 작가의 예술세계를 시기별로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어렵고 불행한 시절이었지만 그가 남긴 작품에는 짙은 열정과 사랑이 묻어나더라고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깊었던 만큼 대부분이 아이들과 함께한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그린 작품이었어요.

 

예술이 주는 힘은 환기에 있다고 생각해요. 좋은 예술은 시공(時空)을 초월하게 만듭니다. 내가 속한 세계에서 물리적으로 만나지 못할, 타인의 삶과 풍경을 접하도록 이끌어 주죠. 새로운 세상이 열렸을 때 느끼는 설렘과 자유. 이는 여행의 속성과도 닮아 있다고 생각해요. 눈앞에 펼쳐진 낯설고 신비로운 존재를 감각하다 보면 어느새 일상의 잡념이 깨끗이 사라집니다.

 

제겐 글과 그림이 그런 존재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영화나 다른 무엇이 그런 존재로 자리할 수 있겠죠. 다큐멘터리 작가 김옥영은 <영화는 무엇이 될 것인가? - 영화의 미래를 상상하는 62인의 생각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화란 나에게 그런 여행이었다. 나의 은하계를 떠나 어떤 신비한 웜 홀을 통과해 다른 우주로 진입하는 것. 나의 삶에서부터 도피하여 타인의 삶이라는 우주를 바라보는 것. 그리고 그 타인의 삶을 경유하여 다시 나의 삶으로 돌아오는 것.

일상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해 타인의 삶을 바라볼 가시거리를 확보할 때 비로소 거기서 나의 삶을 볼 수 있는 가시거리도 생겼다. 우주에서 지구를 돌아보았을 때 그 희미한 푸른빛의 작은 별이 눈물을 핑 돌게 하듯이. 그 경험을 안고 현실로 돌아온 나는 이전과는 분명 다른 어떤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 경험이 만들어 낸 것이 빛이든 그늘이든, 작은 떨림이든 큰 균열이든.

 

여행에서 새롭게 만난 풍경과 사람을 관찰하며 삶을 실감하듯이, 저는 가끔씩 예술의 테두리에서 다른 누군가가 되는 상상을 하며 일상을 낯설게 감각하곤 합니다. 매번 미세하게 다른 그 느낌들이 나의 자리로 돌아왔을 때 다시금 힘차게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어요. 여러분도 이번 가을, 예술의 안팎에서 쉼을 느껴 보시길 바랄게요. 좋은 전시를 발견하면 제게 추천해주세요.

 

그럼 다음 주에 또 만나요!

 

2022.08.28 

애정을 담아

길보경 드림   



삶을 그리는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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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길보경입니다.

 

저에겐 신문 읽기라는 오랜 취미가 있는데요. 아침에 현관문을 열고 신문을 집어 든 뒤,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며 읽곤 합니다. 정신이 온전히 들지 않아서 집중이 잘 되지는 않지만 1면에 실린 기사의 헤드라인과 사진을 먼저 살펴보죠. 인터넷 뉴스를 찾아서 읽지 않기에 매일 종이 신문으로 세상사를 접하는 편입니다.

 

한 장씩 휙휙 넘기며 관심 있는 분야의 기사를 읽는데, 솔직히 정치 지면은 대부분 건너뜁니다. 제일 좋아하는 부분은 시인이나 소설가가 쓴 짧은 칼럼인데요. 우리 삶의 이야기를 솔직하고 위트있게 전달하기 때문입니다. 수수께끼 같은 인생의 본질을 포착하고, 복잡다단한 인간의 감정을 적확한 언어로 표현해 내죠. 작가가 쓴 문장과 제 마음이 포개지는 듯하며 공감이 가고 위로가 됩니다.

 

이번 주말에는 밤새 노느라 아침이 자동으로 삭제되고 말았어요. 느지막이 신문을 들고 책상에 앉았는데요. 대낮에 귀가한 저는 다 포기하고 아무것도 안 하고 싶었지만, 글 쓰기 모드로 돌입해야 하는 날이므로 마음을 다잡고 책상에 앉았습니다. 주말 신문은 여느 날보다 문화 분야의 기사가 풍성합니다. 조금은 말랑말랑한 기사가 많아서 쉽게 몰입할 수 있는데요. 끝자락에 마주한 [이소연 시인의 시적인 순간]이라는 칼럼에서 또 한 번 감탄을 자아내는 글을 접했습니다. 이 기사를 함께 나누고 싶어 서두가 길었습니다.

 

나만의 복수법이라는 제목의 기사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A에게 상사는 다음 세 가지를 요구했다고 한다. 1. 질문하지 말 것. 2. 야근하지 말 것. 3. 일을 빨리할 것. 아직 일이 익숙하지 않은 A가 질문도 못 하는데 어떻게 일을 빨리할 것이며 더군다나 야근도 금지라니 상사의 요구가 가혹하다 싶었다. B는 A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답답하고 복장이 터진 듯했다. “당하고만 있으면 네가 바본 줄 알아.” “널 함부로 대하는 사람에게 잘해줄 필요 없다니까. 너를 존중하는 사람에게 잘해줘.” “요즘 같은 시대에 권력질 하면 안 된다는 거 모르나?” 다 맞는 말이다. B가 지나치게 걱정하는 것 같았는지 A는 자신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며 나름의 복수를 했단다.


“복수를 어떻게 했는데?”


A는 상사가 일을 빨리하라고 하면 일을 더 빨리하는 방식으로 복수했다고 한다. 질문하지 말라고 하면 질문하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이전 문서를 뒤져가며 답을 찾았고, 야근을 못 하게 하면 자료를 싸 들고 와 집에서 일했다고 한다. 성가시고 힘들지만 다 해내는 방식으로 복수한 것이다. 그 말에 B는 더욱더 복장 터진 표정으로 가슴을 쳐댔다. “에라이, 그게 복수냐?”

A는 복수하면서도 상대를 곤경에 빠뜨리지 않았고 자신도 발전하는 중이다. 나는 A의 복수법이 마음에 들었다. 자신을 괴롭히지 않는 복수. 자신을 허망하게 하지 않는 복수. 그것이 진정한 복수 같았다.

(중략)


이쯤 되니 복수란 내가 나를 이기는 방법 같다는 생각이 든다.

 

복수란 내가 나를 이기는 방법이라뇨. 부정적인 생각부터 들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단어를, 이토록 우아하고 유연하게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이 놀랍지 않나요? 세상을 살다 보면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표현을 절감할 만큼,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받는 일이 생기곤 합니다. 나의 의지나 태도와는 관련 없이 무작정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나타나기도 하죠. 현명하게 대처해 잘 극복하면 다행이지만, 감정의 골이 깊어지면 스스로를 위험으로 내몰기도 합니다. 혹여 누군가에게 복수심이 생긴다면 그런 감정을 나 자신을 무너뜨리지 않고 발전의 기회로 삼는 지혜를 발휘할 수 있기를 소망해보아요.

 

여러분께도 저의 글이 당연한 일상을 조금은 새롭게 바라보는, 익숙함 속에서 색다른 재미를 발견하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로 전할 글의 주제는 <나의 삶을 그리는 여행>입니다.


여행의 미덕 중 하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생활을 꿈꾸는지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숙소는 나의 삶을 탐구해볼 수 있는 가장 좋은 환경이 되어 줍니다. 누군가가 정성스레 꾸민 공간에 머물며 내게 맞는 집이 무엇인지 상상해볼 수 있죠.

 

이번 여름, 저는 양양과 부산 그리고 제주와 강릉에서 휴가를 보냈어요. 각기 다른 유형의 숙소에서 머물며 언젠가 마련할 저의 보금자리를 그려 보았는데요. 한 지역씩 차례로 소개하려고 합니다. 며칠 전에 다녀온 강릉의 숙소 한옥 시호일부터 이야기해볼까 해요.

 

강릉중앙시장 인근에 자리한 이곳(https://www.stayfolio.com/findstay/hanok-sihoil)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한옥 숙소입니다. 1970년대에 지어진 고옥을 현대식 주거 공간으로 리모델링했는데요. 이곳의 가장 큰 특징은 사방이 정원으로 둘러싸여 자연과 일상이 자연스레 연결된다는 점입니다. 침실과 거실, 주방 심지어 욕실에서까지 창밖으로 아름다운 꽃과 나무가 보였어요. 물론 실내에도 각종 식물이 놓여 있어 초록의 기운을 제대로 경험했죠.

 

아파트 생활자인 저는 평소 정원에 대한 로망이 있습니다. 하나의 화분도 때마다 잘 돌보기 어려운 현실을 상기해보면 가드닝이 사실은 굉장히 고된 노동이지만요. 초록의 생명이 우리에게 전하는 기쁨은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사람이 식물을 돌보지만 결국 식물이 사람을 돌보는, 그 위대한 순환을 매일 경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넓고 근사한 정원이 없어도 식물을 가꿔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마음을 알 거라고 생각해요. 작은 돌봄이 내 생활에 어떤 즐거움을 가져다주는지요.

 

숙소에 비치된 책과 잡지도 정원이 있는 삶을 누리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킨포크 <가든>과 체코의 위대한 작가 카렐 차페크의 <정원가의 열두 달>이 있었는데요. 전 세계의 정원을 글과 사진으로 만나니, 한옥 시호일의 공간적 특성이 더욱 감각적으로 다가오는 듯했죠. 정원 풍경을 벗 삼아 따듯한 물로 목욕을 하고, 다음 날 아침 빗소리를 들으며 차를 마셨던 순간이 한옥 시호일에서 보낸 최고의 순간이 아닐까 합니다. 

 

다음 주에는 사진과 함께 보다 상세한 강릉 여행기를 들고 오겠습니다. 한옥 시호일로 향하는 길에 들렸던 훌륭한 장소도 덧붙여 말씀 드리고 싶어서요. 그럼 오늘도 제 글을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카렐 차페크의 문장을 인용으로 이만 마치겠습니다.

 

“인간은 손바닥만 한 정원이라도 가져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딛고 있는지 알기 위해선 작은 화단 하나는 가꾸며 살아야 한다.”

 

2022.09.04

애정을 담아

길보경 드림   



일상에 스며든 초록빛 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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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길보경입니다. 오늘도 반갑습니다.


제목에 맞춰 편지에 그리너리한 색을 넣어 보았습니다. 제가 이용하는 스티비에는 생각보다 다양한 기능이 있네요. 하나 하나 시도해 보며 매번 읽는 즐거움이 있는 편지로 찾아 뵐게요. :)


저에게 가장 큰 힘이 되는 것은 피드백일 텐데요. 때마다 잊지 않고 잘 보고 있다는 후기를 남겨 주시는 분들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여러분 덕분에 제가 회사 일 외에도 꾸준히 글을 쓸 수 있어요. 추석 연휴 내내 유튜브를 보면서 시간을 마구 쓰다가 또 이렇게 책상에 앉았습니다. 정말로 구독자 분들이 아니었다면 저는 이번 글을 완성할 수 없었을 겁니다.


저번주에 예고했듯 강릉 여행의 두 번째 편입니다. 정원의 풍경이 흐르는 집 한옥 시호일과 그 주변에 함께 둘러 보기 좋은 장소를 소개합니다. 그럼 시작할게요. 


가을의 초입에 만난 한옥 시호일은 오래도록 꿈꿔 왔던, 정원이 있는 집이다. 강릉중앙시장 인근에 자리한 이곳은 여기 이 좋은 날이란 뜻처럼 정원의 풀향기 속에서 여유를 느끼고 좋은 순간을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만든 숙소이다. 스튜디오 시호일의 세 번째 프로젝트로 1970년대에 지은 고옥을 현대식 주거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사방이 정원으로 둘러싸인 한옥 시호일에서는 자연과 일상이 자연스레 연결된다. 침실과 거실, 주방 그리고 욕실에서까지 창밖으로 아름다운 꽃과 나무가 보였다. 물론 실내에도 각종 식물이 놓여 있어 초록의 기운을 제대로 경험할 수 있다.


바깥의 정원이 자아내는 풍경에 시선을 빼앗기다가 내부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세월의 결이 느껴지는 한옥의 기둥과 보, 주춧돌이 고아한 매력을 뽐내는 가운데 공간을 채우는 가구와 소품, 아트피스가 공간의 모던함을 극대화한다. 


윤형근 화백의 회화를 비롯한 동양적 미감을 품은 그림과 달항아리, 도자기 화분이 유럽의 디자이너가 만든 조명과 조화를 이루며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하기도 했다.


각 공간마다 호스트의 탁월한 안목과 세심한 배려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숙소 이용법과 주변의 여행 코스 추천 등을 담은 안내문과 웰컴 드링크로 준비한 오죽잎차, 귤피로 만든 입욕제 등 게스트에게 최적의 쉼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곳곳에 자리한 스튜디오 시호일에서 자체 제작한 패브릭 제품 등을 경험해볼 수 있었다.


언니와 나는 정원으로 나와 차를 마셨다. 여름을 넘어 가을로 가는 길목이라 앞마당과 뒷마당에 단풍이 예쁘게 물들고, 감나무에 열린 감이 다홍색으로 익어가고 있었다. 아름다운 꽃과 과실수가 있는 정원에 둘러앉아 차 한잔을 나누며 한옥을 바라볼 수 있도록 낮은 돌 의자와 테이블이 놓여있다. 


때마침 비가 내려 처마에서 뚝뚝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여행 중 비가 오는 순간이 이토록 반가웠던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초록빛 풍경을 차경으로 삼아 향긋한 오죽잎차와 함께 오롯한 쉼을 누렸다.


저녁 시간이 가까워 지자 식사 당번을 정했다. 이 지역의 유서 깊은 전통시장인 강릉중앙시장이 지척에 있으므로 시장에서 먹거리를 사 오기로 했다. 아빠와 언니가 다녀오는 동안 엄마와 나는 좀 더 쉬다가 식탁을 정돈하기로 했다. 

 

피로를 회복하기 위한 또 다른 좋은 방법은 목욕이 아니던가. 욕실에 마련된 실내 스파를 이용해 반신욕을 즐겼다. 욕실용 스툴에 읽고 싶은 책까지 골라 두니 완벽했다.


시장에서 사 온 도다리, 쥐치회와 오징어 순대 그리고 과일로 저녁 상을 차렸다. 주방에 마련된 그릇에 음식을 담으니 더욱 먹음직해 보였다. 강릉의 와인숍 민트에서 산 나뚜랄멘떼 비오 네로다볼라와 집에서 가져온 섹슈얼 초콜릿을 곁들이니 아주 완벽한 저녁이 되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다 같이 예능을 보며 맥주를 마셨다. 술과 대화를 좋아하는 우리 가족답게 저녁 내내 행복한 음주의 시간을 보냈다. 한 집에서 오래간 지내며 서로에게 익숙한 가족들일지라도, 여행을 떠났을 때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모습이 있다. 평소라면 가까이 들여다보지 않았을 표정이 보인다. 멋스러운 공간을 마주 했을 때 보이는 호기심 어린 눈빛, 천진한 미소 그러다 문득 읽게 되는 낯선 얼굴.


그저 가족들과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깊은 여행이지만 이렇게 문득 새롭게 다가오는 얼굴을 보면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온다. 나의 버팀목이자 보물 같은 존재인 가족들과 서로의 깊은 곳까지 살피며 많은 시간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아침에는 느지막이 일어나 엄마가 내려주신 커피와 시장에서 사 온 신선한 과일을 넣은 요거트, 삶은 계란 등을 먹었다. 요리가 가능한 시설은 아니었지만 토스터기와 전기 포트 등이 있어 간단히 아침을 꾸리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한옥 시호일에서 머무는 동안 훗날 나의 집에는 작은 정원을 만들어야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어쩌면 자연과 생명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바이오필리아적 소망이 아닐까 싶다. 내가 꿈꾸는 일상에는 매일 흙을 만지고, 식물을 보듬는 나만의 정원이 그려진다. 카렐 차페크의 <정원가의 열두달>과 이후 헤르만 헤세의 <정원 가꾸기의 즐거움>을 읽으며 자기 생각과 의지대로 가꾸는 땅을 꿈꾸어 본다.


당신의 마음 한편에도 숨어 있는 정원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주변 추천 spot>


-민트(@meent_kitchen): 내추럴 와인숍 

-한낮의 바다(@midday_sea): 독립 서점

-오어즈(@oars.kr): 포스터, 오브제 위주의 소품 편집숍

-사유의공간 더빈티지(@sayu_thevintage): 테이블웨어 중심의 빈티지 소품숍

-순두부젤라또(@soontofugelato): 순두부 및 과일 소르베 등 아이스크림 가게 


대부분의 강릉 로컬 숍은 평일 휴무이니, 방문시 인스타그램 참고를 권합니다. 


2022.09.11

애정을 담아

길보경 드림   



여행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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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길보경입니다.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날씨가 심상치 않습니다. 그저께 추분이 지났으니 비로소 낮보다 밤이 긴 계절이 도착했네요. 추위에 취약한 저는 이 시기엔 항상 곰이 되어 겨울잠을 길게 자고 내년에 깨어나고 싶다는 상상을 하곤 해요. 


이 글을 적고 있는 지금, 저는 묘한 흥분과 설렘에 휩싸여 있습니다. 여섯 시간 뒤면 저의 가장 오랜 벗이자 친한 친구인 서경이가 결혼을 합니다. 고등학교 친구들 무리 중 첫 번째로 가는(?) 터라 저희 사이에선 참 놀랍고도 기쁜 소식이었어요. 다 같이 축무를 하기로 했는데 제발, 부디 흥겨운 자리의 분위기를 망치지 않고 무사히 마쳤으면 하네요.


두근대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지난날에 제가 한 매체와 진행했던 인터뷰 글을 다시금 꺼내 보았습니다. 당시 한 달 살기 라는 키워드가 유행처럼 번질 때라, 그에 관한 인터뷰였어요. 제가 조지아에 한 달 반 동안 거주한 경험을 토대로 질문에 답했었거든요. 여행 매거진의 에디터님이 제게 한달살이의 의미가 무엇인지 물어보셨는데요. 저의 답변은 아래와 같습니다.


나에게 맞는 도시와 라이프스타일을 찾아 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전 세계의 여러 도시를 탐험하며 나의 취향을 만들어 가고, 나의 성향에 맞는 활동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을 찾는 거죠. 그러다 마치 운명의 짝을 만난 것처럼, 살기 좋은 도시를 만나면 거기에 더 오랫동안 살아볼 수도 있는 거고요. 저의 경우 다양성을 존중하는 도시를 찾는 것이 목표입니다. 지금까지 베를린과 트빌리시에서 한달살이를 해보았는데, 뉴욕과 발리에서도 꼭 한번 살아보고 싶어요. 이렇게 다채로운 경험이 축적되면 앞으로 내가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가에 대한 방향을 정하는데도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저는 사는 방법의 해답을 여행에서 찾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어떤 인생을 살아갈지 여행의 과정 속에서 배우고, 깨닫고, 결심하곤 했죠. 20대 초반 내내 골몰하던 주제였는데 지금은 조금씩 그 형체가 보여서 점점 제가 원하는 삶에 근접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여행을 지속하며 어느 곳에 무엇을 하며 살지 찾아 나가야겠죠. 이것이 바로 저의 여행의 이유입니다.


지난주에는 서촌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차로 20분 내외면 닿는 곳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휴가를 즐기기에 딱이었는데요. 평소 애착을 지닌 동네라서 어떻게 보내면 좋을지 금방 예측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역시, 서촌은 멋과 맛이 대단한 동네입니다. 고즈넉한 골목길에 조용히 숨 쉬고 있는 카페, 서점, 편집숍도 좋지만 수성동 계곡부터 청와대에 이르는 산책로도 어찌나 아름답던지요.


1박 2일 동안 서촌에서 보낸 하루를 공유합니다. 조만간 이 동네에 방문할 계획이 있으시던 분들은 이 중에서 꼭 한 군데는 가보셨으면 해요! 이번 여정을 함께해 준 Y, 고맙습니다.



스태픽스(@staffpicks_official) - 텍스트북(@salon.textbook)

야외 정원이 있는 카페로 유명한 스태픽스에서는 드넓게 펼쳐진 마당에서 커피와 디저트를 즐길 수 있어요. 날이 좋을 때면 방문하곤 했는데, 이곳 2층에는 더욱 놓쳐서는 안 될 공간이 있어 함께 소개합니다. 텍스트북이라는 서점에서도 커피와 주류를 즐길 수 있는데요. 창밖으로 내다 보이는 탁 트인 뷰 앞에서 멍을 때리며 와인을 마시거나, 책을 읽기에 제격입니다. 


베르판의 VP 글로브 펜던트나, 네모 라이팅의 마르세유, 마르셋의 테이아 스탠딩 램프 등 하이엔드 브랜드의 조명이 가득해서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답니다. 솔직히 다음에 이곳을 방문한다면 스태픽스 말고 텍스트북에서 오래 머물 예정!


PKM 갤러리(@pkmgallery) - 학고재(@hakgojaegallery)

삼청동 갤러리 중 가장 애정하는 PKM 갤러리에서는 현재 한국 현대미술 1세대 거장이자 단색화 대표 작가인 정창섭의 전시가 진행 중입니다. 한지의 원료인 닥나무 껍질을 붙여 만든 <닥> 연작 등을 만날 수 있는데요. 언젠가 박서보, 하종현의 단색화처럼 국제적으로 주목받지 않을까 싶어 흥미로웠죠. 


학고재에서는 강요배의 개인전이 열렸습니다. 제주 출신 작가로 제주도의 자연을 쉭쉭 그려냈습니다. 거침없는 붓칠과 자연에 가까운 색감이 매우 인상 깊었어요. 두 전시 모두 추상 회화를 좋아하는 분들께 추천합니다.


내자동 위스키 바 투어

경복궁역 7번 출구 뒷골목에는 위스키 바가 하나의 마을처럼 형성되어 있습니다. 흔히 내자동 바 골목으로 일컫는데요. 영화 <소공녀>의 주인공 미소가 거처 없이 떠돌면서도 절대 포기 못했던 그 위스키 한 잔의 배경이 된 곳도 여기에 있습니다. 코블러, 텐더바, 소울빌 리스닝바, 슬로우 핸드 등을 검색한 뒤 좁다란 길을 따라가면 한옥을 개조한 우아한 위스키 바를 마주할 수 있습니다. 단정하게 제복을 차려입은 바텐더, 낮게 깔린 음악, 차분하게 어두운 조명 등 영화나 만화 속에서 보던 풍경이 현실로 펼쳐지니 기대하는 마음을 안고 방문해 보시길 바랍니다.


2022.09.25 

애정을 담아

길보경 드림  



깊이 있는 삶 그리고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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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행복한 휴일과 함께 찾아온 길보경입니다.


여섯 번째 편지는 독일의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쓴 책, <깊이에의 강요>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해볼까 합니다. 


"그 젊은 화가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고, 그녀의 작품은 첫눈에 많은 호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그것들은 애석하게도 깊이가 없다." 


소묘에 재능이 뛰어난 한 젊은 여성 화가에게 어느 평론가가 남긴 비평입니다. 이를 접한 그녀는 "왜 나는 깊이가 없을까?"하고 고뇌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결국 스스로를 병들게 만들고 극단적 선택에 이르는데요. 어처구니없게도 그 소식을 들은 평론가는 아래와 같이 말합니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젊은 사람이 상황을 이겨 낼 힘을 기르지 못한 것을 다 같이 지켜보아야 한다니… (중략) 무엇보다도 인간적인 관심과 예술적인 분야에서의 사려 깊은 동반이 문제되는 경우에는, 국가 차원의 장려와 개인의 의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결국 비극적 종말의 씨앗은 개인적인 것에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한때 그렇게 그림을 잘 그렸던 젊은 예술가의 무너지는 모습이 섬뜩하면서도, 원인을 제공한 평론가가 결국 이 사건을 개인적인 문제로 해석하는 것을 보고 또 한 번 아찔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여러분들은 깊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저는 요즘 시간의 깊이에 관해 생각해요. 정확히는 시간을 깊게 쓰는 법을 궁리하며 살아갑니다. 사실 일하는 시간의 대부분은 그저 주어진 업무에 충실하기 때문에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기 일쑤인데요. 제가 고민하는 부분은 휴일의 시간입니다. 


요 근래 주말에 시간을 무의미하게 흘려보내고 건강하지 못한 방식으로 쉬는 저의 모습을 발견했거든요. 무력감과 귀차니즘이 콜라보(?)를 이루며 유튜브 알고리즘에 모든 정신을 맡기는 식이었어요. 차라리 즐겨 보는 영화나 드라마를 몰아 보면 좋을 텐데, 아무런 의미도 관심도 없는 영상을 줄줄이 보았어요. 끼니도 대충 때우게 되면서 즐거운 식사 시간을 인지하지 못하고 영양가 없는 밥을 먹었죠.


물론 누워서 쉬는 시간도 반드시 필요한 행위이지만 저는 제 스스로가 만족하는 휴식의 방법을 알면서도 다음날 컨디션에 지장을 줄 정도로 막 보내는 게 못마땅했달까요. 무엇을 많이 한다기보다는, 한 가지를 하더라도 흘러가는 순간을 깊게 감각하며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한번 실험을 해보았습니다. 저의 신체 에너지는 언제 활성화가 되고, 어떤 행위로 몸과 마음을 깨울 수 있는지요!


저번 주 휴일부터 눈을 뜨자마자 간단히 스트레칭을 하고 조깅을 했는데요. 아침에 일어나서 보내는 1~2시간이 나머지 하루를 결정하더라고요. 어떤 방식으로든 몸에 활력을 불어넣으니 그다음에 무언가를 할 의욕이 생겼어요. 그래서 운동 후 점심도 정성스레 차려 먹고, 커피도 내려 마시고, 친구들이랑 만나서 무엇을 하고 놀지 계획도 즐겁게 짤 수 있었어요.


제겐 아침을 잘 보내는 것이 안녕한 하루를 만드는 밑바탕이 되는 것 같아요. 

2022년 9월 26일자 밑미레터(https://page.stibee.com/archives/73812)에서 아침이라는 브랜드를 운영하고 있는 윤진 님과의 인터뷰를 보니, 더욱 오전의 시간을 사랑하고 아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침을 잘 보내려고 노력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를 위해 온전히 시간을 보내고 나를 채워야 남을 위해서도 충분히 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아침에 나를 위한 개인적인 시간을 잘 보내고 나면 굉장히 이타적인 사람이 돼요. 나를 충분히 채워놓아서 그런지,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거나 바래도 모두 받아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겨요. 이걸 채우지 않으면, 제가 하루를 살아가는 것도 힘들고 저와 함께 지내는 사람도 힘들어질 수밖에는 없으니까 사실 나를 위해서이자 남을 위해서도 이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내가 채워지지 않았는데, 바닥을 긁어가면서 사랑을 모으고 모아서 남에게 주는 건 굉장히 소진되고 소모되는 방식인 것 같아요. 저는 아침을 통해서 이걸 채우고 있더라고요. 주유소에서 기름을 채우듯이, 매일 아침 나를 채우고 세상에 나가서 나눠주는 거죠.


이어서 소개할 여행지는 제주입니다. 지난 여름에 찾아간 제주에서는 처음으로 한라산을 등반해 보고, 머무는 동안 매일 바다에서 수영을 했으며, 샛노란 꽃이 만발한 선인장 밭도 만났었어요. 서쪽과 서귀포 부근을 도는 일정이었는데요. 제주를 방문할 계획이 있는 분들에게 요긴한 정보가 되었으면 합니다.




  • 토투가 스테이(instagram.com/tortuga_stay/)

제주시 한림읍에 위치한 토투가는 바다뷰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선택한 숙소입니다. 침대에 누워 있으면 발아래 드넓은 바다가 펼쳐진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데요. 여행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에서 제주스러움을 한껏 느끼기에 완벽했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바다를 마주하니 여행지의 감흥이 보다 깊게 다가왔어요.  


  • 월령선인장군락지

난대성 기후 덕에 육지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식물이 제주도에는 많이 자라는데요. 그중 하나가 바로 선인장입니다. 월령리는 한국 유일의 선인장 자생지로 바닷가는 물론 마을 안쪽까지 온통 선인장으로 가득하지요. 매년 7월 초가 되면 줄기마다 샛노란 꽃을 큼직하게 피우는데요. 월령선인장군락지 산책로의 초입에 선인장 열매를 갈아 만든 주스를 파는 카페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짙은 핑크빛의 선인장 주스를 받아 들고, 이 산책로를 걸아 보세요! 이국적이면서도 독특한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장소입니다. 


  • 금능이모네

제주도에 가면 반드시 먹는 음식들이 있죠. 제겐 전복죽이 그러한데요. 동쪽에 좀녀네집이라는 전복죽 맛집이 있는데, 이번엔 서쪽에서 버금가는 죽 맛집을 발견했습니다. 금능이모네라는 곳으로 전복죽뿐만 아니라 보말죽, 문어죽 등도 있어요. 무엇보다도 식사 후 바로 앞의 바닷가에서 목도하는 풍경이 예술입니다. 협재 해수욕장 근처라 바다의 색깔이 에메랄드 빛인 데다가 프라이빗 비치처럼 한적하고 조용한 해변이라 더없이 좋았어요.  


  • 제주현대미술관

계획 없이 우연히 닿게 된 저지예술인마을에서 제주현대미술관의 전시를 보았는데요. 김보희 작가의 《김보희-the Days》전이 진행 중이었습니다. 미술관까지 걸어가는 길도 아름다웠지만, 모든 작품에는 생명력 넘치는 제주의 자연이 담겨 있어 매우 인상적이었어요. 특히 위의 작품(Towards, 2021, Color on Korean paper, 57.8 x 37.8cm)을 실제로 보았을 때 탄성이 흘러나왔는데요. 그림 앞에서 한동안 발걸음을 멈추게 만들 정도로 생생한 색채에 매료되었어요. 김보희 작가를 알게 된 것 그리고 이 작품을 마주한 것이 제주에서 가장 선물 같은 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 인디안썸머(instagram.com/indiansummer_jeju/)

마지막으로 애월 한담해변 근처에 자리한 와인바인 인디안썸머를 소개합니다. 탁월한 음악 선곡과 요리, 와인 라인업을 두루 갖춘 곳으로 제주의 밤을 보낼 훌륭한 장소입니다. 최근에 재방문을 해보았는데 변함없이 좋았어요. 큰 빔프로젝터로 뮤직 비디오나 공연 영상을 틀어 주는데 마치 공연을 보면서 와인을 마시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커다란 강아지가 주인보다 더 친절하게 손님들을 반겨주니, 기회가 닿는다면 방문해보시길 바라요!


낭만 있는 가을날 보내시길 바라며,


2022.10.03

애정을 담아

길보경 드림   




공항이라는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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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생활과 나날>의 발행인 길보경입니다.


주말에 서점에 갔다가 <트렌드코리아 2023>을 보고 정말 올해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실감했어요. 오늘로써 새해까지 꼬박 83일 남았더군요.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이 헛헛하게 느껴지긴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름대로 의미 깊은 순간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연말이 더욱 가까워지면 이번 연도를 함께 돌아보기로 해요!


저는 2022년의 남은 나날 동안 여행자로서의 정체성을 되찾아 보려고 합니다. 다음 주에는 가까운 나라로, 11월에는 조금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나려고 하는데요. 시작은 일본의 남부 도시, 후쿠오카입니다. 


항공권과 숙소를 정하고 나니 실감이 나네요. 사실 좋은 가격대의 항공권을 발견하고 조금 충동적으로 결정한 터라 그곳에서 어떤 여행을 할지는 구체적으로 떠오르지 않았거든요. 그러다 오늘 서점에서 가이드북을 찾아보고(저는 아직도 블로그나 인스타그램보다 가이드북에 나오는 고전적인 정보를 좋아합니다만, 펜데믹 이후로 급격한 변화를 겪은 세상이기에 여러 매체에서 정보를 확인해야겠지요.) 후쿠오카가 우동의 발상지라는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어요!


저의 근무지인 성수동에서 일본인이 운영하는 우동집을 자주 찾곤 하는데, 그곳의 우동보다 더 맛있으려나-하는 생각과 함께 갑자기 기대감에 부풀기 시작했어요. 또 제가 좋아하는 굿디자인, 롱라이프디자인을 콘셉트로 한 라이프스타일숍 디앤디파트먼트도 후쿠오카에 지점이 있다고 해요. 도시가 작은 편이라 공원이나 바닷가로의 접근성도 좋더라고요. 일본 특유의 소박하고 아기자기한 감성을 지닌 커피집도 많을 것 같지 않나요? 가서 천천히 돌아보고 많이 걷고 와야겠어요.


조금 알아보고 나니 낯선 도시가 갑자기 익숙하게 다가오며 뭔가 연결된 기분이 들었어요. 역시 여행이 가장 기대되고 떨리는 순간은 떠나기 전, 준비할 때네요. 그렇다면 여행이 본격적으로 실감이 날 때는 언제인가요?


저는 공항이라는 장소를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공항에 가서 비행기에 발을 들이는 순간, 친절한 승무원의 목소리와 창밖의 상공을 눈으로 좇는 그 순간에 여행이 실감 나요. 전 세계 사람들이 출발하고 도착하며, 수많은 여행자가 만나는 장소이기 때문일까요? 그곳에서 느껴지는 묘한 설렘을 좋아해요.


제가 19살 때 공항에 아무 목적도 없이 간 적이 있습니다. 여행을 사랑하는 어른이 될 거라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시절인데요. 그때부터 저는 공항의 장소성을 몸소 경험하고, 여행이 극도로 그리울 때면 종종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몇 년 전 썼던 일기의 일부입니다.


대학 입시에 한창 찌들어 가던 열아홉 살의 나는 문득 허기짐을 느꼈다. 배 언저리에서 밀려오는 공복감이 아니라, 내면에서 비롯된 영혼의 허기짐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천천히 쌓여온 것인지도 모른다. 매일 반복되는 일과, 복장, 풍경, 피로. 대학에 붙지 않으면 그 이후의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겼던, 한없이 여린 영혼의 시절이었다.


그해 여름, 나는 답답한 마음을 안고 공항 철도에 몸을 실었다. 가방에는 펜 한 자루와 수첩 한 권을 담고서. 아무런 목적지도 없고 만날 사람도 없는데 공항에 가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공항에 가면 나는 떠날 수 없어도, 떠나는 사람을 보며 일종의 대리만족을 느끼고 싶었다. 나를 짓누르던 압박에서 벗어나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고 싶었던 것이다.

 

공항은 떠남과 만남이 교차하는 곳이었다. 떠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생기가 가득했고, 돌아온 사람들의 얼굴은 환희로 빛이 났다. 사실 나는 하늘로 떠오르는 비행기를 보고 싶었는데, 그건 불가한 일이었다. 입국 심사장에 들어가서 면세점의 기다란 통로를 거치고 나야, 비로소 대기 중인 비행기를 볼 수 있다는 것도 몰랐다.


넓디넓은 인천공항에 나는 철저한 이방인처럼 이곳저곳을 배회하다가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 앉았다. 학교 앞에도 있는 아이스크림 가게인데, 그곳에 가면 늘 먹던 민트초코칩 맛을 주문했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가족들에게 알렸다. 잠시 공항으로 바람 쐬러 왔다고. 그냥 멀리, 최대한 낯선 곳에 가고 싶었다고. 나는 하고 싶었던 대로 가만히 앉아서 사람들을 지켜보고, 사색에 잠겼다.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공항 내 영화관으로 갔다. 공항에 혼자 간 것도 처음이지만, 영화를 혼자 보는 것 또한 처음이었다. 나는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를 보며 이날의 여정을 마무리지었다. 

 

이제는 대학 졸업을 앞두고, 당시의 일화를 떠올리니 만감이 교차한다. 몇 년 후의 내가 틈만 나면 여행에 가려고 애쓰며 사는 어른이 될 줄 누가 알았으랴. 그때 갔던 곳이 하필 공항이었던 건, 나의 역사를 돌이켜봤을 때 어쩌면 필연이었는지도. ..(후략)..


사실 저는 여행에서 기대하는 부분 중 하나가 철저한 이방인이 되는 것인데요. 아무도 저를 모르는 곳에서, 연결된 사람들 사이에서 한 발짝 물러나 세상을 관찰하는 시간을 꿈꿉니다. 매일 똑같은 교복을 입고, 똑같은 시간에 수업을 듣고, 야간 자율학습을 하던 고등학생에게는 그나마 낯선 사람들이 많은 공간이 공항이었겠죠.


어떠한 제한과 편견과 압박 없이 자유로이 떠돌며 사람을 구경하고, 타자의 삶을 상상해 보는 재미도 저는 여행이 주는 큰 즐거움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일련의 경험이 쌓였을 때 저의 세계도 보다 넓고 깊어지는 것 같아요. 어딘가 고여 있다는 생각, 나의 눈과 정신이 낡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쯤 저는 멀리 그리고 오랫동안 여행을 다녀올 생각입니다. 현재는 나름대로 현실과 타협해서 영민하게 기회를 만들려고요. 일단은 후쿠오카에 다녀와서 또 어떤 변화가 생길지 기대가 되네요.


저의 오랜 단짝, 은희가 이틀 전에 2주간의 유럽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어요. 날씨가 맑았던 어제 연남동 공원에 돗자리를 펼쳐 앉아 그녀의 여행담을 들었는데요. 저랑 여러 번 여행했던 동료로서 제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를 잔뜩 들려주었답니다.


변함없이 아름다운 파리의 모습부터 커피가 정말 맛있었다는 런던 그리고 암스테르담과 지베르니에서 각각 마주한 반 고흐와 모네의 작품들까지. 긴 여행을 마치고 온 여행자답게 형형히 빛나는 눈빛과 여유가 묻어나서 제가 다 기뻤습니다. 그녀로부터 받은 파리, 암스테르담, 런던의 사진을 끝으로 오늘 편지를 마무리할게요. 이번 주도 제 글을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안온한 가을날 되시길 바라며

애정을 담아, 


2022.10.09

길보경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