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은 순환한다. 시간도 그 궤도를 피해 갈 수 없다. 어느덧 세밑이 지나고, 다시금 새로운 해가 밝았다. 내게는 연말이 다가오면 의식을 치르듯 매해 반복하는 행위가 하나 있다. 바로 새해의 소원을 적는 것. 아홉 개의 네모 칸에 실현 가능성과 도전 정신을 적당히 버무려 쓰기에, 요원하지만 충분히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된다. 그 소원 중 하나가 한 달에 한 번 전시 보기이다. 근 몇년간의 버킷 리스트에서 꾸준히 변치 않고 등장한다. 내가 어떤 삶을 지향하는가를 보여주는 단편적인 부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새해가 밝았다. 나는 2020년의 첫 미술관으로 환기미술관을 골랐다. 신문에서 본 김환기의 작품이 불현듯 떠올랐고,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검색해보니 미술관은 부암동 언덕의 외딴 골목길에 있었다. 2019년은 김환기의 아내 김향안이 설립한 환기재단의 40주년이었고, 이를 기념해 환기미술관은 <미술관은 내용이다(The museum is the content)>라는 특별전을 열었다. 더불어 아트 판화전 <판화로 보는 김환기의 예술세계>와 <Whanki in New york - 김환기 일기를 통해 본 삶과 예술> 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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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기미술관은 실로 그녀의 남편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미술관의 설계 방식, 실내 디자인, 전시 구성 등 모든 면에서 그랬다. 미술관에 입장하는 순간 공간의 규모에 압도되는데, 두드러지게 높은 층고 때문이었다. 김향안이 충분히 높은 천장을 만든 이유는, 김환기가 작품 대부분을 대형 캔버스에서 작업했기 때문이다. 큐레이터의 설명에 의하면, 환기미술관 설립 초기 대부분의 국내 미술관에서는 공간상의 문제로 김환기의 대형작을 들일 수 없었다고 한다. 환기미술관만이 해낼 수 있는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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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향안은 김환기의 작품으로 비트라유(유리에 그림을 그린 색유리)를 만들어야겠다는 다짐도 환기미술관에서 이뤄낸다. 어딘가에 은은하게 숨 쉬고 있는 비트라유를 한번 찾아보시라. 김환기의 드로잉을 바탕으로 프랑스 유리공방의 장인에게 의뢰하여 제작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특히 작가들이 비트라유가 참으로 좋다고 감탄을 한다. 나도 바라보고 섰으면 그 아름다운 선들이 울려오는 것을 느낀다. 그 걸려진 상태를 보고 싶어 했는데 나의 게으름으로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보여주지 못한 것을 사과한다. 수화(김환기의 호)는 내가 죽고 나서라도 눈 있는 사람이 와서 내 그림을 볼 때 인정할 거라고 자신만만했다. 그 눈 있는 사람은 실로 늦게야 왔다. - 김향안, 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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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는 공간은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으로 헛헛해진 마음을 달래기 위해 찾아온 사람에게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다. 올해의 첫 전시로 김환기 작품을 보니, 시작이 좋다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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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40길 63


시간

매일 10:00-18:00 (월요일 휴무)


웹사이트

www.whankimuseum.org